여기서는 여기서만 가능한

🔖 한 얼굴을 오래 쳐다보고 있는 것은 고통스러운 감정을 불러일으키는데 그것은 그 사람의 얼굴에서 마침내 나를 발견하기 때문이다. 발견은 언제나 절단의 경험을 동반한다. 불가해해야 할 타인이라는 존재는 어떤 계기로 초라하고 시시한 껍데기로 전락한다. 얼굴의 동물적인 면, 야만적인 장면들은 갑자기 고쳐 써야 할 비문처럼 내 앞에 들이밀어진다. 나는 당혹스러워지는데 이 얼굴에 대해 아는 바가 하나도 없음에도 이미 뭔가를 판단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기 때문이다. 얼굴이 언어의 안으로 비집고 들어오기 시작한다. 그렇지 않다. 방안의 낯선 자처럼 그렇게 태연하게 언어는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판단은 언제나 유예되어 있었을 뿐이다. 하나의 얼굴에서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단지 하나의 인간일 뿐이어야만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열하고 뻔뻔한, 우글거리는 말들의 소굴의 나락으로 우리는 추락한다. (...) 내가 타인에게 폭력적일 수 있는 만큼 나도 그에게 종속된다. 얼굴끼리 맞댄다는 것은 무지막지한 폭력에 서로를 제물로 내어주는 엄청난 호혜를 베푸는 행위나 다름없다. 쳐다보고 있기. 그리고 판단하기. 나로서는 이 판단을 멈출 방법이 없다. 인간을 인간으로 대우하는 방법을 모르겠다. 그러나 견뎌야 한다는 진실만은 명백하다. 타인 역시 내 얼굴을 견디고 있기 때문이다. 얼굴을 내놓고 다님으로써 인간들은 각자를 견디고 산다. 죽이지 않고 잘 견딘다. 그럴 수 있으려면 얼굴은 비참할 정도로 계속해서 읽혀져야만 한다. 우리를 이끌고 내동댕이치는 단 하나의 매개가 언어이기 때문이다.